예루살렘 전기 ( 964 page )  /   저자 :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신의 축복과 인간의 탐욕이 공존하는 도시”
예루살렘의 전 생애를 파헤치는 최초의 시도!

하나의 신이 사는 집, 두 민족의 수도, 세 종교의 사원. 이와 같은 수식어는 지구상에서 단 하나의 도시, 오직 예루살렘에만 붙일 수 있다. 그 땅은 오랜 역사를 지나면서 단 한순간도 지속적인 평화를 가진 적이 없으며 파괴와 건설을 수없이 반복해왔다. 예루살렘을 소유한 사람들은 영원히 그 땅을 갖고 싶어 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빼앗고 싶어 했다. 그렇게 여러 번 주인이 바뀌어오면서 예루살렘은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이면서도 가장 분쟁이 많은 도시로 형성되었다. 그런데 왜, 그 땅의 운명은 그래야만 했는가? 무엇이 그 땅을 그토록 소유욕에 불타는 도시로 만들었던 것인가?
신간 《예루살렘 전기》(Jerusalem : The Biography) 는 예루살렘 땅의 모든 역사를 이야기한다. 그 땅의 장대하고 성스러운 역사를 비롯하여 그곳에 살고 배회하며 소유하려 들었던 수많은 개인과 민족의 역사를 담았다. 이 책은 단순히 종교나 분쟁에만 초점을 맞춘 책이 아니며 목적론적 서술로 모든 역사가 필연적이었음을 이야기하는 책도 아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전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예루살렘에 대한 가장 깊고 넓은 이해를 제공한다.
예루살렘을 전방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왜’라는 질문에 가장 적절하고 명쾌한 해답을 내려준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역사는 곧 세계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현재 자행되는 국제 사회의 분쟁과 테러, 갈등과 번민이 거의 모두 예루살렘에서 기인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예루살렘은 세계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예루살렘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국제 사회에 대한 올바른 식견으로 이어진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성서 속에서만 성스럽게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21세기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그 땅은 여전히 살아 숨 쉬며 말을 거는, 성스럽고도 처절한 도시로 존재한다.

어디에도 없었던 이야기,
사실 그대로의 예루살렘을 서술하다

저자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Simon Sebag Montefiore는 유대인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예루살렘을 배회해오면서 가장 사실로서의 역사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저자는 또한 예루살렘과 유대인을 위해 힘쓴 시온주의의 선구자 모지스 몬티피오리 경의 후손이기도 하다. 따라서 저자는 어쩌면 예루살렘의 역사를 기술하는 데 가장 적합하고 유일한 서술자일 것이다.
몬티피오리는 수많은 예루살렘 관련 책을 보았지만 사실에 가장 가깝고 예루살렘의 속살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책을 찾을 수가 없어 자신이 직접 펜을 들었다고 한다. 책을 쓰기로 결심한 후에는 오랜 시간 방대한 자료조사를 거쳤다. 교수, 고고학자, 가문들, 정치인들을 일일이 만나 이야기를 나눴으며 발이 닳도록 고고학 유적지를 찾아다녔다. 그 결과 그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또는 한 번도 활용된 적이 없던 자료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한 모든 내용이 이 책에 고스란히 잘 버무려져 있다.
저자는 일생에 걸쳐 이 책의 집필을 준비해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고백한다. 지상과 천상에 존재하며 신앙과 정서에 의해 지배되는, 그 어떤 말로도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예루살렘은 그의 손끝에서 재탄생되었으며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게 표현되었다.

아브라함의 세 종교,
그 땅을 향한 욕망의 역사를 펼치다

이 책 《예루살렘 전기》에서 우리는 긴 호흡으로 펼쳐지는 역사 가운데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세 종교(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기원과 탄생, 전개를 만나게 된다. 하나의 신을 모시지만 서로 다를 수밖에 없으며, 같은 장소를 가리키지만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같은 곳에 있지만 마치 자기들 종파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서로를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 조금의 치우침도 없이 드러나고 있다.
아브라함의 세 종교는 모두 예루살렘을 소유한 역사가 있다. 그러나 서로 뺏고 빼앗기기를 반복해왔기 때문에 어떤 종교가 그 땅의 실소유주인가는 명확하지 않다.
유대인은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예루살렘에 거주해왔다. 그들은 신의 축복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었으며 이 믿음은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분할로 본격적으로 해외로 흩어지게 된다. 그러나 디아스포라(팔레스타인이 아닌 다른 지역에 살면서 유대교적 종교규범과 생활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의 거주지)에 살면서도 그들은 메시아가 시온에 올 것이라는 믿음을 더욱 확고히 했으며 19세기 후반 드디어 예루살렘으로의 재입성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땅에 마침내 자신들의 나라를 세웠다.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시작되었다. 예수를 신으로 믿느냐 아니냐 하는 논란 등으로 많은 종파가 생겨나긴 했지만 비잔틴제국의 국교로 선정되면서 평탄한 미래를 맞는 듯했다. 후에 이슬람의 지배로 탄압의 역사를 걸었던 그리스도교는 서구 사회에서 시작된 십자군전쟁으로 반등을 노렸다. 그러나 십자군전쟁은 시간이 거듭되면서 애초의 정신을 잃어가고 갈등의 씨앗이 되고 만다.
이슬람은 무함마드의 창시로 시작되었다. 예루살렘은 그가 신의 계시를 받기 위해 하늘로 승천한 곳이었다. 따라서 이슬람에게 예루살렘은 성지였고 그곳을 지켜야만 했다. 세력을 확장하며 1,500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살아온 이슬람 아랍인, 즉 팔레스타인인들이 시온주의라는 맹랑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들의 땅을 침략해오는 유대인들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팔레스타인인들은 저항을 시작했고, 둘 사이의 불편한 역사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세 종교와 함께 진행되어온 예루살렘의 역사는 무척 화려하고 복잡하다. 그것은 신에 대한 믿음 이상이었고 어쩌면 신앙은 정복을 위한 도구였는지도 모른다. 무엇이 진실이든 간에 그들이 지나온 것은 투쟁의 역사이며 피의 역사, 눈물의 역사임이 틀림없다. 이는 예루살렘을 막연히 종교의 아름다운 성지쯤으로 생각했던 이들에게는 어쩌면 충격으로 다가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실상을 파악할 때 신앙은 더욱 확고한 자리를 잡아갈 것이다.

오늘 아침의 예루살렘 이야기까지,
반복되는 역사의 끝나지 않은 마침표

《예루살렘 전기》는 21세기 예루살렘까지로 이야기를 넓혔다. 박제된 역사를 넘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따끈따끈한 현황까지 이 책은 예루살렘의 오늘 아침, 아니 다가올 내일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1917년 영국 내각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고향’을 건설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밸푸어 선언이 이루어지고 난 후 예루살렘에서는 소유를 위한 본격적인 현대적 분쟁이 시작된다. 그 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는 중동전쟁과 인티파다가 발생했다.
1993년 이후로는 길고 긴 협상이 계속되고 있다. 이 긴 협상 가운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둘 중 어느 하나도 예루살렘을 공유할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2010년 오바마 대통령이 나선 양측의 회담도 성과는커녕 냉랭한 기운만이 감돌았을 뿐이었다. 예루살렘의 현재는 과거 헤롯 시대, 십자군 시대, 영국령 예루살렘 시대처럼 똑같이 복잡하고 미묘하다. 과연 예루살렘에 평화라는 것이 도래할 것인지, 몇 십 년 후에도 예루살렘이 존재할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책을 번역한 한국외국어대학교 유달승 교수는 옮긴이의 글에서 이 책은 어쩌면 누군가를 무조건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잘못된 사랑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다고 했다. 수천 년을 지속해온 그 땅에 대한 열망과 집착. 그것은 앞으로도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을 것이며 사그라지지 않는 욕망으로 국제 사회를 지배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루살렘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며 예루살렘이 세계의 중심인 이유다. 예루살렘은 오늘도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