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무드
 탈무드(תלמוד): Introduction

 

          탈무드는 서기 전 200년대부터 서기 후 500년대까지 7세기동안 이스라엘과 바벨론에서 축적된 유대 율법과 전승을 담은 권위 있는 서책이다. 탈무드의 어근은 ‘배우다’ 또는 ‘가르치다’라는 의미를 가진 “라마드”(למד)이다. 탈무드는 미쉬나(משנה; *역주: 미쉬나는 토라(모세오경)에 대한 주석으로서 문자적으로는 “반복 학습”을 의미한다)와 미쉬나에 대한 랍비들의 해석, 곧 게마라(גמרא)를 포함시키고 있다. 탈무드는 예루살렘 탈무드와 바벨론 탈무드로 나뉜다. 수세기동안 예루살렘 탈무드는 대체로 도외시되었고 탈무드라 인정되었던 것은 주로 바벨론 탈무드와 게마라였다. 탈무드가 16세기에 기독교 교회의 감독관들에 의해 검열되었을 때 유대인들은 탈무드를 게마라라 바꾸어 부르기도 했다. 탈무드의 또 다른 이름은 여섯 가지 법도라는 뜻을 가진 어구 “시샤 스다림” (ששה סדרים)의 두문자어(두문자어)인 샤스(ש"ס)이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아서 전승했다고 믿어지는 구전율법은 서기 200년 미쉬나에 편입되었고, 게마라는 그 후 이스라엘에서는 2세기 동안, 바벨론에서 3세기 동안의 논쟁의 결과물로 형성되었다. (*역주: 시내산에서 모세가 여호와께 받은 것은 “랍비의 구전율법”이 아니라 “모세오경에 기록되어 전승된 율법”이다. 그러나 랍비 유대교는 모세오경에 기록된 율법뿐 아니라 구전율법도 하나님으로부터 모세에게, 그리고 모세로부터 후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전해졌다고 주장한다)

          ​탈무드의 시대는 미쉬나와 게마라의 시대로 나뉜다. 이것은 문학적인 형식에 따른 분류가 아니다. 유대율법 전체를 포괄하는 규정인 할라카(הלכה)를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역주: 할라카는 유대 율법을 유대인들의 삶에서 실천해야 할 실제적인 지침으로 정리한 것이며, 이른 바 유대인의 “613개의 율법”을 포함한다). 할라카의 각 규정들이 갖는 권위는 원전의 권위에 의해 결정된다. 원전이 더 오래되었을 수록 그것에서 나온 할라카도 더 큰 권위를 갖는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이 미쉬나의 율법보다 더 권위가 있고, 미쉬나의 율법이 게마라의 율법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인정받고, 게마라의 율법이 할라카에 따른 결정사항들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랍비들에 대한 호칭도 시대별로 다르게 주어졌다: 미쉬나 시대의 랍비들은 타나임, 곧 가르치는 자들이라 불리며, 게마라 시대의 랍비들은 아모라임, 곧 설명하는 자들이라 칭해진다.

          ​미쉬나는 거의 할라카에 대해서만 다루며, 랍비식 변론과 토론의 최종 결과만을 기록한다; 주장과 증거들과 그것들을 뒷받침하는 성경의 텍스트에 대한 긴 논증은 대체로 배제되어 있다. 미쉬나는 당시의 랍비들의 진술을 모은 비중 있는 책이지만 미쉬나 이외의 책들 중에도 이 진술들을 집성한 것들이 있다. 구전 율법에 대한 전통적인 연구 방법은 미드라쉬 할라카에 4권의 책으로 집성되어 있다. 미드라쉬는 성경 텍스트에 관한 랍비적 주석이나 해석을 의미한다; 미드라쉬 문집에 실린 랍비들의 진술들도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미드라쉬 할라카는 성경에 실린 율법에 대한 랍비적 해석을 뜻한다.

          ​율법과 성경 해석에 대한 랍비들의 진술 중에는 미쉬나나 미드라쉬 할라카에 실리지 않은 것도 많다. 이러한 진술들은 바라이토트(“외부의” 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 ברייתא(바라이타)의 복수형)라 불린다. 이러한 바라이토트들의 집합체를 토세프타라고 하는데, 이것은 R. 유다 하나시(R. Judah Ha-Nasi)가 미쉬나를 편집하고 몇 세대가 지난 후에 집성되었다. 토세프타는 미쉬나와 동일한 구조와 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토세프타조차 미쉬나에 포함되지 않은 모든 랍비적 진술의 완전한 편집물은 아니다. 수많은 바라이토트는 탈무드에서 게마라(어근: 아람어의 게마르; “전통에서 익혀지는 것”이라는 뜻)라 불리우는 더 큰 두 번째 난(欄)에 보전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역사를 시대별로 깔끔하게 정리하기 원하지만, 탈무드를 두 시대로 나누는 정확한 경계선은 불분명하다. 실로 미쉬나가 출판되고 널리 유포되자 구전 율법의 연구 방법도 바뀌었다. R. 유다 하나시의 동료들과 제자들은 새로운 미쉬나오트(미쉬나의 율법들)를 제정하는 대신, 기존의 미쉬나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땅이 전 세계 유대인들에게 미쉬나 시대의 두드러진 영적 중심지였지만, 두 번째 중심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제 1 성전 파괴 이후 추방당한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살아왔었다. R. 유다 하나시가 미쉬나를 출판한 무렵에는 바벨론 학파들이 이미 명성과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영향으로 게마라가 이스라엘과 바벨론 두 곳에서 개별적으로 편찬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 탈무드와 바벨론 탈무드]

          ​미쉬나와 달리 게마라는 율법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율법에 관한 논의 외에도 미드라쉬(성경 본문에 대한 토론)의 상당 부분과 아가다(성경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한 랍비적 우화들), 랍비와 관련된 설화들, 의학적 조언들, 과학적 철학적 논쟁들, 그리고 마귀에 대한 연구가 다뤄진다.

          ​게마라는 미쉬나에 대한 분석으로 시작해서 어떤 항목을 율법에 포함시킬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으로 끝난다. 대개 율법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과 함께 율법의 새로운 원칙이 세워진다. 심지어 어떤 견해를 표준적인 관행으로 삼을 것인지를 논의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최종적인 결정이 유보되는 항목도 있다. 이런 항목은 “테쿠”라는 두문자어(頭文字語)로 마무리 하는데, 이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뜻이며, 엘리야가 메시야의 임재를 알리기 위해 이 세상에 왔을 때 엘리야에 의해 풀릴 것이라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땅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환경은 바벨론보다 더 빠른 속도로 악화되었다. 그로 인해 랍비들은 구전 율법을 한 번 더 문자로 기록해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서기 425년, 탈무드의 첫 번째 에디션(미쉬나와 게마라)이 유포되기 시작했다. 이 탈무드는 이스라엘 학파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탈무드 데-베네 마아라바(서쪽 인들의 탈무드; 이스라엘이 바벨론보다 서쪽에 위치했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음)’라 불렸다. 후대에 이것은 예루살렘 탈무드라 불린다.

 

[예루살렘 탈무드]

          ​이름이 암시하는 바와 달리 예루살렘 탈무드는 예루살렘 랍비 학파의 저작이 아니다. 이 탈무드는 주로 그 시대에 유대인들이 밀집되어 살던 이스라엘 북쪽의 가이사랴, 셉포리스, 그리고 티베리아에서 편찬되었다. 예루살렘 탈무드는 바벨론 탈무드의 1/3 분량으로 모든 미쉬나가 게마라를 포함하지는 않는다. 미쉬나의 마지막 두 규례인 코다쉼(성전과 제사의 율법)과 토호로트(부정(不淨)의식 율법)에 관한 게마라가 없다. 여러 이론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이 예외의 이유를 시원하게 설명해내지 못했다. 현대 학자들 중 어떤 이들은 이 두 가지에 관한 규례가 텍스트에 이미 들어있다고 주장하지만 다수 학자들의 동의를 얻지는 못하고 있다.

          ​예루살렘 탈무드의 게마라는 서(西)아람어의 갈릴리 방언으로 기록 되었다. 아람어 외에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도 부분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이들 언어로 기록된 부분에는 오류가 많이 발견된다. 전체적으로 논의들은 짧고 신랄하다. 예루살렘 탈무드의 1/6 정도는 할라카가 아닌 것들을 다룬다. 이는 팔레스타인 학파가 별개의 미드라쉬와 아가다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역주: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은 서기 2세기 로마가 바르코크바의 난을 진압한 이후 유대인들이 오늘날의 요르단과 이집트를 포함한 이스라엘 땅에 연관성을 느끼지 못하도록 붙인 이름이다) 학파의 랍비들이 고립상태에서 연구와 토론을 진행한 것은 아니다. 팔레스타인 학파와 바벨론학파의 교류가 계속 이루어졌고, 학생과 교사들의 교환연구도 계속되었다. 예루살렘 탈무드는 서기 400년에 최종판이 나왔는데, 이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은3세기에 활동한 R. 요하난 바르 나파하(Johanan Bar Nappaha)이다. 바벨론 게오님(*역주: 탈무드적 지혜와 지식으로 유명한 유대 학자를 가온이라 함. 게오님은 가온의 복수형)이 바벨론 탈무드를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한 반면, 예루살렘 탈무드는 오랜 세월 평가절하해왔다. 사아디아 가온(Saadiah Gaon)은 예루살렘 탈무드를 자기 글에 인용한 몇 안 되는 권위자 중의 하나였다. 예루살렘 탈무드는 이스라엘, 북아프리카 그리고 이탈리아 남부에서도 연구되었다. 중세 스페인계 탈무드 편집자인 마이모니데스(Maimonides)는 동시대의 프랑스와 독일 학자들보다 훨씬 더 자주 예루살렘 탈무드를 언급하고 인용했다. 예루살렘 탈무드를 처음으로 주석한 사람은16세기에 스페인에서 추방되었던R. 솔로몬 시릴로(R. Solomon Sirillo)였다. 예루살렘 탈무드에 있는 아가다는 1590년에R. 사무엘 야페 아쉬케나지(R. Samuel Yafeh Ashkenazi)에 의해 출판되었다. 18세기에는 빌나의 가온R. 엘리야(R. Elijah, the Gaon of Vilna)를 포함한 리투아니아 탈무드 편집자들이 예루살렘 탈무드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이에 대해 집중적인 연구를 했다. 20세기에는 사울 리베르만(Saul Lieberman), 루이스 긴즈버그(Louis Ginzberg), 그리고 아딘 스타인살즈(Adin  Steinsalz)를 포함한 학자들이 예루살렘 탈무드의 여러 역본으로 출판하고 그에 대해 글을 쓰기도 했다.

 

 [바벨론 탈무드]

          ​바벨론 탈무드는 예루살렘 탈무드와는 다른 점이 많다. 바벨론 탈무드의 게마라는 절반은 히브리어, 나머지 절반은 동(東)아람어로 기록되었다. 헬라어와 라틴어 용어들이 쓰이긴 했으나 예루살렘 탈무드와는 달리 오류는 발견되지 않는다. 바벨론 탈무드에서 다뤄지는 주제들은 더 폭이 넓고 다양하다. 게마라의 1/3은 할라카를, 나머지 2/3는 미드라쉬와 아가다를 다룬다.

          ​바벨론 탈무드에 나오는 미쉬나 텍스트는 예루살렘 탈무드에서 비롯된 변이형(variant)들을 많이 싣고 있다. 이 변이형들이 어떤 연유로 생겨났는지에 대해서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미쉬나의 초기 판본과 개정판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예루살렘 탈무드는 후대의 개정판을 사용했다). 다른 학자들은 바벨론 탈무드가 바벨론 학파에서 미쉬나를 연구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바벨론의 학자들은 미쉬나 텍스트에 대해서 더 비판적이었고 텍스트를 교정하는 것에 대해 거리낌이 없었지만 변이형 때문에 생긴 의미변화가 율법의 내용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 두 가지 탈무드는 언어, 형식, 내용, 범위, 주제의 폭, 수정 날짜, 그리고 최종적으로 율법에 대해 부여하는 권위의 정도에서 차이가 있었다. 바벨론 탈무드의 편찬이 완료되었을 때, 그 내용과 율법적 결정사항을 수용하자는 공식적인 결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바벨론 탈무드는 자연스럽게 공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바벨론 탈무드는 이스라엘 땅의 학자들이 쓴 자료들을 많이 싣고 있다. 그래서 후기의 할라카 권위자들은 바벨론 탈무드가 이스라엘 땅의 학자들이 내린 할라카적 결정사항들을 다 수용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바벨론 탈무드는 라브 아쉬(Rav Ashi)와 라비나(Ravina)에 의해 편집되었다고 인정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이 견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탈무드가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단계들을 거치며 편집되어왔으므로 탈무드는 사실상 R. 아쉬가 죽은 서기 425년 이후에 살았던 많은 무명의 랍비들의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후대의 학자들인 사보라임은 텍스트에 간략한 주석을 더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탈무드의 편찬이 완료된 이후 몇 세기 동안 바벨론 학파의 규모와 명성과 영향력은 점차 커져갔다. 바벨론 공동체는 세계의 유대인 사회의 중심이 되었다. 그 결과 탈무드 완성 이후 두 세기가 지나기 전에 게오님은 바벨론 탈무드를 자신들의 율법적 결정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 후 위대한 율법 교사들인 이삭 알파시(Isaac Alfasi), 모세 마이모니데스(Moses Maimonides), R. 아쉐르 벤 예히엘(R. Asher Ben Jehiel), 그리고 요셉 카로(Joseph Caro)는 그 탁월성을 인정하여 바벨론 탈무드를 사실상 유일한 탈무드로 간주하게 되었다.

 

 [탈무드의 판본들]

          ​16세기 이전에 기록된 탈무드 필사본 중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것은 희소하다. 이는 1242년 로마 카톨릭 교회가 파리에서 자행한 탈무드 소각 사건을 비롯하여 역사적으로 지속되어 온 박해 때문일 것이다. 카톨릭 교회의 박해와 탈무드 소각은16세기까지 계속 되었다. 바벨론 탈무드 전체 내용이 처음으로 완간 된 것은1520년대 베니스의 기독교 출판업자 다니엘 봄베르그(Daniel Bomberg)에 의해서였다. 그는 곧이어 예루살렘 탈무드도 출판했다. 그 후 여러 차례 다양한 탈무드 판본들이 출판되었다. 오늘날 가장 널리 사용되는 탈무드 판본은 19세기 말에 빌나에서 출판된 판본을 부분적으로 수정하여 출간한 것이다.

 

[유대인들의 삶에 끼친 탈무드의 영향]

          ​탈무드는 9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구전율법이 성문화되어 형성된 것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탈무드가 각 시대마다 유대인들의 신앙과 행위에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탈무드 연구의 중요성은 말씀(토라)을 강론하라는 계명(참고: 신 6:7, 11:19)의 해석이 곧 탈무드를 강론하라는 것으로 해석될 만큼 강조된다. 오늘날에도 전 세계의 유대인 사회는 탈무드 연구를 랍비들이 힘써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로 여기고 있다.

          ​특히 바벨론 탈무드는 법전 이상의 의미가 있다. 탈무드는 유대적 사상, 역사, 성경주해, 민간전승들의 보고(寶庫)이다. 궁극적으로 탈무드는 유대교와 유대적 삶의 본질을 형성시켰고, 탈무드의 율법규정들은 유대교를 삶의 전 영역을 아우르는 삶의 지침으로 변화시켰다. 

 

원전: Geoffrey. W. (1989), Talmud. In the Encyclopedia of Judaism (pp. 684), the Jerusalem Publishing

 

탈무드의 예화들

<대머리>

라브 아미와 라브 아시가 랍비 이삭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랍비 이삭에게 말했다.
“스승님, 유대율법에 대하여 가르침을 주십시오.”
그러자 다른 이가 랍비 이삭에게 말했다.
“랍비님, 설교적 가르침을 나누어주십시오.”
랍비 이삭이 설교에 관하여 가르치기 시작하자 첫 번째 학생이 계속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랍비 이삭이 유대율법에 관하여 입을 떼자 두 번째 학생이 이야기를 막아버렸다.
그러자 랍비 이삭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비유 하나를 들어주마. 이것은 마치 젊은 부인과 나이든 부인들 둔 남자와 같다.  젊은 부인은 남편이 젊어 보이게 하려고 흰 머리를 뽑고, 나이든 부인은 남편이 나이가 들어 보이게 하려고 검은 머리카락을 뽑았다. 결국 그는 이 머리 저 머리 다 뽑혀서 대머리고 되고 말았다!”

-바벨론 탈무드, Bava Kamma 60 B


<아낌없는 기부>

기부금을 모으기 위해 랍비 아키바와 또 한 명의 랍비가 길을 떠났다. 그들이 벤 야인이라는 부자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그 집의 아들과 벤 야인이 하는 대화가 들렸다. 
“오늘은 무엇을 사올까요?”
“싱싱하지 않은 상추를 사 오너라. 어제 남은 떨이를 사오면 시든 것이라 값이 쌀 것이다.”
이 대화를 들은 랍비들은 예전에는 부유했던 벤 야인이 지금은 가난해졌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그 집은 지나쳐 다른 집으로 향했다. 
다른 모든 집들을 돈 후에, 랍비들은 벤 야인의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집 주인인 벤 야인이 랍비들에게 물었다.
“ 왜 평소와는 달리 저희 집에 먼저 들러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 집에 처음으로 왔었소. 하지만 당신 아들과의 대화를 들었소.”
그러자 벤 야인이 말했다.
“그건 저와 제 아들간의 대화일 뿐, 저와 하나님과의 대화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제 아내에게 가셔서 돈이 든 주머니를 달라고 하십시오.”
랍비들이 벤 야인의 부인에게 가서 그 말을 전하자, 그녀가 물었다.
“돈이 끝까지 찬 주머니를 주라고 했나요, 아니면 넘치는 주머니를 주라고 했나요?”
“그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넘치는 주머니를 드리겠습니다.  제 남편이 넘치는 주머니를 드리라고 했다면 그의 뜻대로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더 들어간 돈에 대해서는 결혼을 할 때 남편이 제게 주기로 약속한 금액에서 제가 직접 감당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일을 전해 들은 벤 야인은 결혼할 때 부인에게 약속했던 금액의 두 배를 부인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참고]
에스더 라바의 버전에 따르면 부자는 자신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제 자신의 필요에 관해서는 얼마든지 인색할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창조주가 주신 계명인 기부(헌금)에 관해서는 그러한 방종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탈무드 Pesachim 4:9; Esther Rabbah 2:3

편역: 이스라엘 문화원
  DATE   2015-07-31 14: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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