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누카(Hanukkah)

하누카

(Prof, Choi's Jewish Hebrew Lectures)

 

히브리어로 건물의 ‘헌당’을 의미하는 하누카는 서기 전 167년부터 안티오쿠스 4세의 유대교 탄압에 반기를 든 마카비 가문과 이에 동조하는 무리가 게릴라전을 통해 그리스 군대를 무찌르고 이교도에 의해 더럽혀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봉헌한 사건에서 유래됐다(마카베오서)

 

태양력으로 보통 12월에, 유대력으로 키슬레브 제 25일에 시작하는 하누카는 서기 전 164년 그리스통치하의 작은 유대민족의 마카비가문이 그리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과 그리스 헬레니즘에 대한 유대믿음의 영적승리라는 두 가지 의미를 축하하는 절기이다. 성전 등잔에 불을 밝힐 올리브 기름이 오직 하루 분밖에 남지 않았으나 성전이 새로 봉헌될 때까지 8일 동안이나 기적적으로 불을 밝힐 수 있었다는 전설에 따라 하누카 절기는 8일 동안 지켜지게 됐다. 하누카는 아홉 개의 촛대를 밝히는데 성전의 기적을 기념하며 저녁마다 하루에 하나씩 불을 켜며 팔 일째에는 8개를 다 켠다. 아홉 개 중 나머지 한 촛대는 다른 촛대를 켜는데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하누카의 메시지는 주권의 회복측면을 강하게 부각시킨다. 디아스포라 이후 널리 행해졌으며 서로 선물 나누기나 팽이놀이(회전팽이 – 히브리어로 스비본) 같은 풍습이 있다. 팽이의 네 면에는 네 개의 히브리어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위대한 기적이 여기서 일어났다’는 뜻의 히브리어 네 단어의 첫 글자들이다. 또 디아스포라는 ‘위대한 기적이 거기서 일어났다’는 이니셜을 뜻한다. 이 네 글자는 숫자로 계산하면 합이 메시아라는 단어와 같기 때문에 특별하게 취급되기도 한다. 하누카 기간에 학교는 휴교하며 직장이나 상점은 쉬지 않는다.

 

하누카라는 말은 '봉헌(dedication)'을 뜻하며, 셀룩시드 왕조(Selucid Dynasty)의 안티오커스 4세(Antichus IV)에 의하여 더럽혀졌던 성전을 재 탈환하여 하나님께 바쳤던, 성전 봉헌을 축하하는 명절이다. 한글 개역 요한복음에는 성전을 수리한 명절이라하여 수전절(修殿節)로, 표준새번역에는 성전 봉헌절로 번역되어있다. 해마다 하누카가 되면 이스라엘 국회의사당을 위시한 주요 공공 건물 앞엔 명절을 축하하기위한 거대한 촛대가 설치된다. 가운데 가지 외에 양쪽으로 네개씩 여덟 개의 가지를 갖춘 모두 아홉 개의 촛불을 켤 수 있도록 만든 촛대를 가르켜 하누카 촛대 또는 하누카 메노라라고 부른다. 이 기간동안 저녁이 되면 집집마다 창가에 비치는 하누카의 촛불이 아름답다. 명절 첫날 해가 지면 첫번째 촛불에 불을 부친다. 다음날 해가 지면 두번 째 촛불에 불을 부친다. 이렇게 매일 하나씩 늘어가는 촛불은 팔일동안 계속된다. 하누카는 유대력으로 키스레브(Kislev)월 25일에 시작하며 양력으로 치면 12월에 해당한다. 따라서 유대인의 하누카 명절은 크리스마스와 같은 날이다. 단지 하누카는 음력을 따르므로 두 명절이 같은 날 겹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보통 삼 사일에서 칠 팔일 정도 차이가 난다. 그러면 하누카의 유래와 의의를 살펴보자. 

 

주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이 당시 세계 최대의 강대국 페르시아를 정복한 사건은 서방의 역사가 동방의 역사에 간섭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시리아, 팔레스타인,이집트를 정복한 후 동쪽으로 계속 진군하여 인도의 갠지스강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제국을 이룩한 알렉산더는 세계를 하나의 정신으로 통일하고자 하였다. 그의 꿈은 단순히 군사적 정치적 세계통일이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던 그는 가는 곳마다 헬라풍의 도시(Polis)를 세워 시민권을 주고 원로원을 두어 민주 의회제도를 실시하여 그리이스의 도시국가 형태의 정치체제를 갖추도록 하였을뿐 아니라, 극장, 목욕탕, 원형 경기장, 체육관등의 헬라의 문화를 일반 대중에게 보급하였다. 이와같은 헬라 정책은 진보적인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크게 확산되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 건설된 대표적인 도시를 소개하면 세바스티아(사마리아), 톨레미(악고, 행 21:7), 스키토폴리스(벧산), 필라델피아(암만) 등이 있다. 헬라 정책을 통한 세계통일이라는 알렉산더의 원대한 꿈은 주전 323년 그의 나이 33세의 갑작스런 죽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퍼져나갔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제국은 넷으로 나뉘었다. 이 일로 이스라엘은 북쪽의 셀룩시드(Seleucid) 왕국과 남쪽의 톨레미(Ptolemy) 왕국 사이에 위치하게 되었다. 처음 100년간(주전 320-200)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중심을 둔 남쪽의 톨레미 왕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 기간동안 이스라엘은 양대 세력의 중간에서 많은 시달림을 당하였으나 종교적으로는 비교적 독립적인 위치를 지킬 수 있었다. 톨레미 왕국은 군사권을 제외한 정치, 종교의 자치권을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였고, 대제사장은 정치, 종교의 실제적인 수반이 되었다. 

주전 3세기 말 셀룩시드왕조의 안티오커스 3세(Antiochus III)의 침입을 어렵게 막아낸 라피아(Raphia) 전투 이후(주전 218년) 톨레미 왕국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양국의 전쟁이 치열해지며 이스라엘의 운명은 그 앞 길을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20년 가까이 지속된 전쟁 가운데 이스라엘엔 톨레미 왕국을 지지하는 이집트파와 셀룩시드 왕국을 지지하는 시리아파가 생겼다. 보수주의자들은 톨레미 왕국에 진보주의자들은 셀룩시드 왕국에 희망을 걸었다. 전자가 종교적 이유때문에 톨레미 왕국을 선호하였다면, 후자는 헬라의 문화에 매료된 자들로 정치, 경제적 목적으로 셀룩시드 왕국을 선호하였다. 주전 200년 파네이온(Paneion) 전투에서 톨레미 왕국이 패하자 이스라엘은 셀룩시드 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셀룩시드 왕국의 헬라화 정책은 안티오커스 4세(Antichus IV)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 그는 자신을 '에피파네스(Epiphanes)'라 명명 하였는데 이는 '신의 나타나심'이란 뜻으로 자기를 올림푸스의 제우스 신으로 섬기도록 강요하였다.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는 친 헬라파 인사인 야손(Jason)을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으로 세웠다. 야손은 그의 이스라엘 이름인 '여호수아'를 '야손'으로 바꾼 사람으로서 대 제사장 오니아스(Onias)의 형제였다. 그는 친 헬라파 인사중 비들기파에 속하여 유대의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파와도 대화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야손은 안티오커스 밑에서 3년간 대제사장으로 일하였다. 그러나 셀룩시드 왕국과 톨레미 왕국의 전쟁이 재연되자 헬라파 매파가 득세하게되었고 비들기파인 야손은 메넬라우스(히브리 이름: 므나헴)에 의하여 축출되었다. 메넬라우스는 사독 가문에도 속하지 않아 제사장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안티오커스로 부터 엄청난 돈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사들였다. 안티오커스 입장에선 그의 헬라 정책을 수행하기에 합당한 인물이었다. 마침 톨레미 왕국과 싸우던 안티오커스 4세가 죽었다는 소문이 예루살렘에 퍼지자 친톨레미왕국 유대인들은 반란을 일으켜 야손을 공격하였고 야손과 그의 추종자들은 마지막 남은 성채에 포위된채 전멸할 위기에 처하게되었다. 소문과 달리 살아있던 안티로커스 4세는 이집트에서 돌아오는 길에 예루살렘을 공략하고 야손을 구출한 후 친톨레미 유대인들을 무차별 살륙하였다. 

 

이어 성전의 금, 은 보물들을 약탈한 안티오커스 4세는, 유대인의 모든 제사 행위를 금지시키고, 안식일과 할례를 금하며, 이 법을 어기는 유대인은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뿐만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을 헬라 성전으로 만들고, 제단에는 유대인들이 금기로 여기는 돼지를 죽여 바쳤다. 유대인들에겐 참을 수 없는 신성모독이었다. 그뿐아니라 안티오커스 4세는 군인들을 시켜 제우스 신의 동상을 지성소에 세우도록 하였다. 그는 모든 유대인들을 제우스 신에게 절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로서 유대인들은 더 이상 성전에 나가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고 유대 종교는 이로서 그 생명을 다한 듯 하였다. 안티오커스는 헬라 정책의 성공으로 그를 추종하는 친헬라파 유대인들을 통하여 세금을 원활히 거두어 드리며 이스라엘에 완전한 평화를 정착시켰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작은 마을에 일어난 사건 

헬라화 정책을 뒤 엎은 유대의 새로운 역사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25키로 떨어진 '모디인(Modi'in)'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안티오커스의 군인들은 모디인이라는 조그만 마을의 사람들을 모두 한 자리에 집합시켰다. 그들은 왕의 명령으로 전국을 다니며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제우스 신에게 절하도록 강요하는 중이었다. 사람들이 모이자 군인들은 제우스 신에게 절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제사장 가문의 한 사람인 마따디아(Matthathias)라는 사람이 군인들에게, "왕의 영토에 사는 모든 이방인이 왕명에 굴복하여 각각 조상의 종교를 버리고 그를 따른다 작정하였다 하더라도, 나와 내 아들들과 형제들은 우리 조상들이 맺은 계약을 끝까지 지킬 결심이오 "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한 사람의 유대인이 앞으로 나가 제우스 신에게 절하였다. 그때였다. 마따디아는 앞으로 나오더니 칼을 빼 제우스 신에게 절한 유대인을 죽이고 이에 달려드는 군인까지 죽인 후 산 속으로 달아났다. 이것이 독립국가 하스모니안(Hasmonian) 왕가를 일으킨 유명한 마카비(Maccabee) 전쟁의 시작이다. 그에겐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셋째 아들인 유다 마카비(Judah Maccabee)가 특히 그 용맹으로 유명하여 헬라주의에 반대한 그들의 전쟁을 가르켜 마카비 전쟁이라 한다. 

 

성전탈환과 봉헌

산속으로 들어간 마따디아와 그의 아들들은 그를 따르는 많은 반헬라주의자들과 연합하여 시리아의 군대에 대항하였다. 삼년간의 전쟁 끝에 그들은 성전을 탈환하였다. 마카비서 는 성전탈환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적을 물리치고 성전에 들어서니 제단은 오염되었고 성전의 문들은 불타버려 부서져 있었다. 성전뜰에는 잡초가 자라고 제사장들의 방도 다 무너진채 방치되어 있었다. 처참한 모습에 유다와 그의 군인들은 옷을 찢고 머리에 재를 쓰고 땅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땅에 대고 통곡하였다. 유다 마카비는 신실한 제사장들을 세워 성전을 정결케 하였다. 부정한 돼지로 더러워진 제단은 허물어 버리고 새로운 돌로 새 제단을 만들었다. 또한 금관과 금 방패를 만들어 새롭게 봉헌하고 부서진 문들을 만들어 달고 무너진 방들을 수축하였다. 

 

새로운 촛대를 만들고 향을 피우고 새로 성전을 봉헌하였다. 성전이 더럽혀진지 정확하게 삼년, 유대력으로 주전 164년 키스레브월(12월) 25일에 생긴 일이었다. 삼년전 키스레브월 25일에 빼앗겼던 성전은 정확하게 삼년 후 같은 날에 봉헌되었다. 예배 없는 삼년, 희생 제사 없는 삼년, 유월절, 맥추절, 장막절의 순례 예배 없는 삼년이었다. 성전을 새로 봉헌한 유다 마카비는 이 날 키스레브월 25일 부터 팔일간을 하누카 명절로 지키도록 명령하였다. 유대력으로 키스레브월은 태양력의 12월에 해당하므로 태양력으로 환산하면 12월 25일(크리스마스)이다. 제이 마카비서에 의하면 키스레브월 25일 부터 팔일간을 장막절과 같이 지켰다고 기록되어있다. 유대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시편의 할렐송 을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하누카와 빛

하누카하면 메노라 와 촛불이 얼른 생각난다. 하누카가되면 유대인 가정마다 메노라에 촛불을 밝히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창가에 켜있는 촛불은 하누카의 상징이 되었다. 하누카 촛대는 초를 꼿을 수 있는 아홉 개의 가지를 갖고 있다. 여덟 개는 짧고 한 개는 길다. 긴 것을 가르켜 '샤마쉬'라고 부르는데 이는 '종(Servant)'이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하누카가 되면 하루에 하나씩 촛불을 켠다. 첫째날에 한개, 둘째 날에 하나 더, 셋째날에 하나더, 이렇게 하여 마지막날에는 여덟개의 촛불을 밝힌다. 그러나 가운데 있는 샤마쉬는 처음부터 켜 놓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아홉개의 촛불을 밝히는 결과가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예수님보다 한 세대 앞선 힐렐 시대에 촛불을 밝히는 순서에 대하여 힐렐 학파(the school of Hillel)와 샤마이 학파(the school of Shamai)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샤마이 학파에서는 첫날 여덟 개의 촛불을 다 켜 놓고 하루에 하나씩 불을 꺼나가 마지막 날에 오직 한개만 남게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힐렐 학파에서는 첫 날에 하나만 켜고 하나씩 늘려나가 마지막엔 여덟 개의 촛불을 다 밝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와같은 사실은 하누카와 관련되어 촛불을 켜는 풍습이 유다 마카비 시대보다 훨신 늦게 정착된 것을 보여준다. 

 

하누카 명절을 빛과 관련지어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은 주후 1세기의 유대 역사가 요셉푸스(Flavius Joshephus) 이다. 그는 제일 마카비서의 기록을 인용한 후 그때 이후로 유대인들은 이 날을 명절로 지키는데 이 명절이 다름아닌 "빛의 절기(Feast of Lights)"라고 하였다. 그러면 왜 하누카를 '빛의 명절'이라고 까지 불렀을까? 유대인의 게모라(Gemorah)에서는 그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유다 마카비가 성전을 탈환하였을 때 메노라에 가보니 대제사장의 확인이 있는 기름(올리브기름)은 단지 하루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기름이나 사용할 수 없었다. 성전에선 레위기 법에 따라 거룩한 기름만 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적은 양의 기름에도 불구하고 성전의 메노라는 팔일동안 꺼지지 않고 그 빛을 밝혔다. 제사장들은 이 기간동안 성전을 다시 정결케할 수 있었으며 거룩한 기름도 준비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하누카 절기가 어떻게 '빛'과 관련이 있는지를 보여주며 왜 팔일 동안 지키는지 설명해준다. 

 

이와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왜 하누카엔 불을 밝힙니까?"라는 질문에 유대인의 미드라쉬 게모라(Midrash Gemorah) 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리이스 사람들에 의해 파괴된 성전에 하스모니안 왕가(Hasmonian Dynasty) 의 대제사장이 처음 들어갔을 때 그곳에서 여덟 자루의 창을 발견하였다. 유대인들은 창날 끝에 나무를 끼우고 불을 붙였고 어두웠던 성전은 빛으로 밝아졌다. 이 이야기는 왜 하누카엔 팔일 동안 불을 밝혀야하는지 그 유래를 설명해주고 있다. 

 

그럼 언제 불을 붙혀야 하는가? 유대의 전통은 해가 지면서 부터 길거리에 사람들이 없어지기까지라고 규정하고 있다. 오늘날과는 달리 전기불이 생기기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가 지면 곧 집으로 향하였고 길거리에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하누카 촛불은 어디에 둘 것이가? 유대의 전통은 대문 밖에 두라고 되어 있다. 이층 이상의 집에 사는 사람은 길에서 가장 가까운 창가에 하누카 촛불을 밝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핍박하는 이방인들의 위험이 있는 마을이나 동네에선 하누카 촛불을 밖에서 보이지 않토록 집안에만 밝힐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중세기에 들어서며 하누카 촛불은 유대인에게 중요한 의식으로 자리잡았다. 돈이 없다면 남에게 꾸던지 겉 옷을 팔아서라도 하누카 촛불을 밝혀야 했던 것이 당시 유대인의 풍습이었다. 또한 촛불이 켜있는 동안 여인들에겐 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하누카가 되면 유대인들은 치즈를 먹는 풍습이 있다. 아쉬케나지 유대인들(Ashkenazi Jew) 은 팬 케익을 먹는 풍습이 있으며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도우넛을 먹는 풍습이 있다. 또 아쉬케나지 유대인들은 초에 불을 붙힌 후 '내 구원의 반석(마 오즈 쭈어 예수아티)'이라는 13세기 독일에 살던 모르데카이(Mordekai)라는 사람이 쓴 찬송을 부르는 풍습이 있다. 스파라딕 유대인들(Sparadic Jew) 은 시편 30편을 음송한다. 하누카는 즐거운 명절이다. 모든 유대인들은 이 기간동안 많은 게임을 즐긴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드라이델(Dreidel)이라고 불리는 납으로 만든 팽이를 갖고 노는 일이다. 하누카가 되기 두세주 전부터 사람들은 납을 녹여 팽이를 만든다. 팽이는 사각형태의 옆면을 갖고 있다.

 

네개의 면에는 각각 히브리어 앞파벳 눈, 김멜, 헤, 쉰이 양각되어 있다. 팽이를 돌려 눈자 있는 쪽으로 쓸어지면 아무것도 아니다. 헤자가 있는 쪽으로 팽이가 쓰러지면 반만 이기는 것이고 김멜자가 써있는 쪽으로 쓰러지면 완전히 이기는 것이다. 그러나 쉰자가 써있는 쪽으로 쓰러지면 게임에 지는 것이다. 눈으로 시작하는 '니쉬트'라는 말은 이디쉬어 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헤는 이디쉬어의 '할브(halb)'의 첫 글자로서 반이란 뜻이고,김멜은 이디쉬어의 '간츠(gants)'를 대표하며 온전한이란 뜻이다. 쉰은 이디쉬어의 '슈레히트(schlecht)'를 나타내며 나쁘다는 뜻이다. 독일어의 nicht(nothing), halb(half), ganz(all), schlecht(bad)와 거의 유사하다. 

 

하누카 촛대는 '하누키야' 혹은 '하누카 메노라'라고도 부른다. 그레코 로만(Greco-Roman)시대 에는 흙으로 만든 램프를 사용하였다. 탈무드시대 에 이르러 청동제품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여러가지 형태의 램프가 만들어지면서 중세기에 이르러 놋쇠가 많이 쓰였다. 기름을 사용하던 램프는 초를 끼워 촛불을 붙히는 촛대 형태로 점차 바뀌어 현재는 끄으름이 적은 촛대를 주로 사용한다. 램프가 사용되었을 당시엔 불을 붙히는 구멍이 여덟 개였으나 후대에 이르러 촛대가 사용되면서 아홉개의 가지를 가진 촛대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시대를 따라 변한 하누카 램프는 이제 이스라엘 예술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신약적 조명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고 하셨다. 또 날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치시면서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 9:5)"고 하셨다. 유대인들의 핍박을 염려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유대 지방으로 가고자하는 것을 만류하자 그는,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요 11:9)"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2장에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요 12:35-36)." 

 

관심을 끄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 9장, 11장, 12장에서 계속 빛에 관한 말씀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요한복음 10장이 수전절(하누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한복음 10장 22절은,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라고 증거한다. 여기서 수전절은 다름아닌 유대인의 하누카 명절을 가르킨다. 모든 유대인들이 하누카의 촛대에 촛불을 붙이며 200년 전에 있었던 성전 탈환과 성전의 새로운 봉헌을 축하하는 하누카 명절에 예수님은 성전에서 자기 자신이야말로 성전의 빛이라고 선포하셨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세상의 빛이요(요 8:12), 빛을 믿는 자마다 빛의 아들이 된다고 가르쳤다(요 12:36). 

 

하누카와 크리스마스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는 장소이다. 성전을 볼 때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에 거하시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장소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빌어 예수님으로 나타나셔셔 사람들중에 계셨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요 1:14)"라고 증거하였다. 성전에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났다면 이제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 1:3)"라고 증거한다. 비로소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게 되었고 직접 볼 수 있게 되었다 (요일 1:1).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을 통하여 직접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육체를 성전과 동일시 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라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그 말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요 2:20)"라고 물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의 육체를 성전에 비유하셨던 것이다(요 2:21). 말씀대로 예수님은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마지막 날의 모습을 묘사하며,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라고 증거하였다. 

 

세월이 흐르며 교회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정확한 날짜를 확정할 필요가 생겼다. 그러나 예수님이 태어난 날짜는 보존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역사안에 인간으로 들어오셔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이신 이 날을 어느 날로 확정할 것인가? 유대인의 하누카 명절인 키스레브월 25일이야 말로 적합하였다. 크리스마스는 이방인들의 명절을 따랏을 가능성보다는 기왕에 있던 유대인의 명절인 하누카에 신약적인 의미를 더 부여하여 수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유대 기독교 학자로 유명했던 알프레드 에델샤임(Alfred Edersheim)은 하누카 명절의 날짜 키스레브월 25일이 초대교회에 의하여 크리스마스 날짜로 수용되었다고 주장한다. 크리스마스야 말로 진정한 성전을 봉헌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마스는 진정한 성전, 예수님의 몸이 봉헌된 날이다. 

 

 

 

헬라사상과 히브리사상 

오늘의 서구 문명이 헬라사상과 히브리사상이라는 양대 기둥위에 서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때 하누카의 의의는 더욱 크다. 하누카야 말로 헬라문명 일색의 당시 서구 세계에 히브리 사상의 자리를 확고하게한 역사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하누카는 유대력으로 키스레브월 25일 양력으로 계산하면 12월 25일이다. 크리스마스는 양력 12월 25일이다. 어떻게 같은 날이 되었을까? 우연일까? 12월 25일은 예수님이 실제로 태어난 날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12월 25일은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들로 나가 밤새 양을 치는 계절로선 적합하지 않다. 그렇다면 왜 교회는 예수님의 생일을 12월 25일로 정하였을까?

 

 

  DATE   2015-08-14 10:3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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